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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내와 사랑의 시간들 |
인내와 사랑의 시간들
윤보경 (경성대학교 일어일문학과)
1989년 대학 졸업 후 그 해 9월에 시작된 유학생활은 2001년 3월에 끝을 맺었다. 귀국 후 시간에 쫓겨 유학 생활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꽤 긴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에 있는 동안에는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내가 해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일본 유학을 염두에 둔 것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일본어를 공부하게 된 이상 살아 있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것은 물론 앞으로 일본에 대해 논할 때에는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일본을 말하고 싶다는 것과 여러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일본은 어떻게 경제적 강국이 될 수 있었으며 또한 일본이 세계 속으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졸업 후 막상 유학 준비를 하려니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일본을 갈 때는 지금과는 달리 유학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은사님께 조언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먼저 내가 여자라는 것과 일본어 자체를 전공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것을 고려해서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거처와 일본말도 우리말과 같이 방언이 있기 때문에 방언이 심한 지역보다는 표준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 결과 은사님의 지인이 계신 벳부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는 1989년 3월에 내가 일본에 직접 가서 어떤 어학연수 과정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보통 일본의 대부분의 대학은 별과라는 이름의 어학 과정과 대학 또는 대학원의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일본 학생들과 같이 듣고 싶은 수업을 들으면서 어학공부를 하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이 있었다. 난 대학 연구생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것은 일본어를 배우면서 전공 기초공부를 해 두는 것이 대학원 진학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직접 서류를 준비해 그 해 9월 일본 벳부에 발을 내디뎠다. 벳부에서는 은사님의 지인인 일본인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도착한 그 날부터 잠자는 시간 빼고는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벳부대학에 한국학생은 나 혼자였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할 때 외에는 거의 일년 동안 한국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일본어 실력은 이 시기에 제일 많이 향상된 것 같다. 매일 매일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일본어는 무슨 말이든 뜻을 몰라도 무조건 앵무새처럼 따라했고 말하다가 틀렸다 싶으면 고쳐서 말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한번 틀린 말이나 귀로 들었거나 책에서 본 말 중에서 어떤 때 어떤 감정 상태에서 얘기해야 할지 모르는 말은 꼭 기억해 두었다가 이렇게 저렇게 사용해 봐서 나의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난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내가 지내던 댁 일본 분들이 날 딸같이 잘 대해 주셨고 특히 그 댁의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일본말을 하다가 틀리면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박식하셔서 일본에 대해 모르는 것을 여쭤보면 항상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 그러다 보니 난 모르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묻는 버릇이 생기고 덕택에 일본어를 잘 못하는 부끄럼에서 점점 난 아직 배우는 단계니까 틀리고 묻고 하는 것이 당연한 거야라는 배쨩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년이 지난 후에는 생활에 불편 없이 일본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생활속에서의 나의 노력과 환경은 학교수업을 듣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원을 진학하는 데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일본어만 되면 일본에서 가고 싶은 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론 시험준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공의 어떤 부분을 공부할 것인지 확실히 해야 했고 또 그것에 관한 소논문도 필요했다. 그 당시 벳부 대학에는 대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 대학원을 지원해야 했다. 그런데 유학생의 경우대학원에 지원하는데 있어서 월등한 실력의 소유자라면 모를까 가고 싶은 대학원을 바로 지원해서는 합격하기가 매우 어렵고 보통은 들어가고자 하는 대학원의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일본어와 전공기초공부를 1년간 공부한 다음 대학원에 지원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자신이 없어진 나는 많은 공민에 빠졌다. 다시 가고자 하는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대학원 시험을 쳐 보느냐, 시험을 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하나, 한번 실패하면 비자문제도 있고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데 부모님께서 그걸 허락하실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올 때 속으론 박사공부까지 하고 와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께는 연수만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린 터였기에 자비 유학인 내가 다른 지역에서 새로 연구생부터 시작하려고 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반대하실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이런사실을 부모님께 의논드리자 역시 연구생을 하는 것은 반대하셨고, 또한 연고지가 없는 곳에는 보낼 수 없으니 대학원에 가고 싶으면 지인이 계신 니이가타시에 있는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보내 주실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전공하고자 하는 일본어 현대 문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관서지방이나 동북지방으로 가야하는데 참으로 난감했다. 공부는 계속하고 싶고 바로 대학원을 지원할 자신은 없고 또 제대로 공부하려면 관서지방이나 동북지방으로 가야 하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머리가 깨질 정도로 고민했다. 그때만 해도 어려서 이거다 싶으면 그것 외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외골수였기 때문에 머리가 터지도록 혼자 고민하다가 못 견뎌서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고민만 한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고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아는 사람을 통하고 통해서 니이가타 대학에 대해 알아 본 결과 마침 현대 문법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 말씀도 따르고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도 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1991년 무사히 니이가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대학이지만 국립대학이어서 등록금은 사립대학에 비해 훨씬 싼 편이었고 입학해서는 성적과 생활을 고려해 수업료 면제(우리나라의 성적 장학금)를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학금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물가도 동경에 비하면 싼 편이어서 새로운 생활의 시작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대학 수업은 발표 위주였고 과목은 어학과 문학, 현대어에 고전까지 이해하여 소화하기보다는 전부 삼켜 넘기기에도 바빴으며 쏟아져 나오는 과제들을 해내기란 정말 역부족이었다. 대학 1년차 전공 발표 수업 때는 수업시간 내내 문제점을 제시하고 질문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 학생들은 어떻게 저런 문제점을 제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하다가 수업을 끝낸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년을 보내고 2년차에는 석사 논문을 준비해야 했는데 대학원을 들어오긴 했지만 전공에 대한 지식이 너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사를 졸업해야 하니까 논문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논문을 일단 쓰기는 했으나 내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기에 제출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하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제출하자니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연구 할 수 있는데 이 정도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한해를 더 한다면 학교의 여러 가지 혜택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내가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도 없었다. 생각 끝에 제출일 전날 교수님을 찾아뵙고 제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무슨 말씀이든 해 주시길 바랐는데 교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말 야속하고 힘이 쭉 빠졌다. 그 날부터 1년간 나의 생활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능력도 없는데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길은 이쪽이 아닌 것이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의 적성에 안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또한 나보다 일본어를 훨씬 못하는 학생들도 졸업을 하는데 후배들 보기 창피해서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 외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 논문을 쓰는데도 교수님께서는 내가 며칠 동안 고생해서 논문을 써서 가면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말씀만 하셨지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다. 나의 석사 때 교수님은 평소에는 매우 친절하시고 격이 없이 대해 주시지만 공부 면에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적이 없어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유학생이란 빨리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기에 쫓기며 특히 일본어를 전공하기 때문에 일본인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때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아랑곳없이 교수님은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참고 그냥 묵묵히 교수님의 OK가 있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일본어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립되기 시작했고 더불어 자신감도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지만 묵묵히 꾸준히 끝까지 한 대가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감이 생기자 그때부터 논문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교수님께서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고 여러가지 조언도 해 주셨다. 그 결과 석사를 3년만에 졸업하고 박사 과정을 진학하게 되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3년에 학위를 받아야지 하는 의욕에 차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공허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그러자 5년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래선 안된다고 마음을 다져보았지만 아음을 다지면 다질수록 3년 만에 논문을 써야겠다는 의욕은 오히려 압박감으로 변했고 마음도 지치니 몸도 지쳐왔다.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해 왔는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힘들다고 다른 데로 도망간다면 다른 것을 한들 그것 또한 힘들면 또 다른 데로 도망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면 난 평생 내것을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도망만 다닐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쉽사리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치더라도 지금 시작한 일은 끝을 맺은 후에 도망지차고 나 스스로를 달랬다. 이러한 갈등과 고민속에서 세월을 견뎌내어 2000년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학위를 받는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그동안 잘 견뎌냈구나”하고 나를 칭찬했다.
그러나 10여 년간의 긴 시간동안 내 뜻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물론 부모님의 격려와 위로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유학시절 동안 알게 된 일본사람들 그분들의 따뜻한 사랑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벳부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본에서의 나의 보증인으로 유학 당시 나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집 길흉사에는 반드시 참석해 주시는 분들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분들과 허물없이 지낸 것은 아니다. 처음에 난 그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혹 말 실수는 하지 않을까 내 행동이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매우 조심스러워서 쉽게 다가가지를 못했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나의 부모님은 가끔 벳부에 오셔서 어머니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두분께 대접하셨고 아버지는 집안을 이리저리 깨끗이 치워주시곤 했다. 난 일본사람들은 개인 생활의 간섭과 지나친 친절은 싫어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부모님께서는 두 분 방식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시는 게 혹 실례가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반응은 의외였다. 일본어를 할 줄도 모르시는 부모님과 금방 친해지셨고 일본 분들 또한 부모님이 오실 때마다 최고의 대접을 해 주셨다. 그때 난 언어와 생활 습관이 다르더라도 사람을 마음으로 대하면 서로 이해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몰랐던 석사 때 나를 정성껏 가르쳐 준 것은 같은 연구실 친구들이었다. 일본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그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고민도 들어주고 같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한국음식도 만들어 같이 먹으면서 마음을 먼저 열어보였더니 그 친구들도 힘들 때 괜찮다고 격려해 주고 아플 땐 집에까지 찾아와서 먹을 것을 챙겨주고 병원에도 데려가 주는 등 일본 친구들도 마음을 열어 주어 지금도 연락하고 지낼만큼 친하다.
유학시절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하는 것 외에 거의 10녀간 계속해 온 일이 있다. 한국어 시민 강좌다. 한국이 좋아 한국어를 배운다는 그분들의 연령은 10년 전 30대에서 60대분들이었다. 나에게 한국어를 배울 때는 나를 선생님으로 대접해 주시고 평소에는 자식같이 챙겨 주셨다. 기운이 없거나 아플 때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시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주시기도 하고 내 생일과 명절에는 쓸쓸할까봐 집으로 부르셔서 같이 지내주시고 좋은 곳으로 구경도 시켜 주시고 출산때는 애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시고 박사 입학과 졸업 시는 축하금 등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분들에게 받은 도움을 열거하자면 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난 그분들의 한결 같은 격려와 보살핌 덕분에 긴 유학생활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었으며 소정의 목적을 이루고 당당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나만의 일본을 경험한 나는 가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을 들려 주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기회만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일본에 대한 선입견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일본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이 글은 재한국일본국총영사관 발행 "일본유학경험집"에서 전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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